바다 건너의
배려를 발견하다
봄바람처럼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봉사의 설렘
울릉군 최복희 씨
다시 돌아보다
“혼자서 제 발로 자원봉사에 빠져들게 된 것은 아니에요. 솔직히 봉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울릉도에 와서 주변의 권유로 적십자에 가입하게 되었죠. 그전에도 적십자가 어떤 곳인지는 알았지만, 가입하고 나서야 어떤 도움을 나누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이어오게 됐네요.”
육지에서 약 3시간을 배를 타고 들어가야 나오는 섬, 울릉도에도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최복희씨다. 그녀가 처음부터 울릉도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강원도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10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던 중, 울릉도에 계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서 30년 전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계속해서 서울에 살았다면 아마 봉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거예요. 하루하루 사는 데 급급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꿈같은 일이었죠. 하지만 울릉도에 오면서 다시 여유를 찾았어요. 삶의 여유를 찾게 되니깐 그제야 이웃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서울에서 보냈던 10년은 치열했다. 그녀의 어려움이나 외로움에 진심으로 다가와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의 벽은 계속해서 높아져만 갔고 삶을 회색빛으로 만들었다.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기쁨과 보람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그런 생활 끝에 오게 된 울릉도에서 만난 적십자는 그녀 삶의 색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서울에서는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조금만 한눈팔아도 뒤처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한 번 뒤처지면 따라잡는 건 너무도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사치가 되는 일상이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도 귀를 닫게 되었다. 울릉도에 들어와 가입하게 된 적십자는 그녀에게 잃어버렸던 여유를 다시 돌려주었다.
삼무도(三無島), 울릉도
울릉도는 옛날부터 세 가지가 없는 섬이었다. 공해, 뱀, 도둑이 없는 섬이다. 도둑이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울릉도 사람들은 대문을 잠그지도 않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는다. 그래서 담장도 도시에 비해 턱없이 낮다. 서로를 믿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라도 마당을 허락한다. 최복희 씨의 마음의 담장도 울릉도에 온뒤로 자연스럽게 낮아지기 시작했고, 그녀 삶의 많은 부분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봉사를 시작하고 나서 가장 변화한 점은 제 시선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내 앞에 닥친 일들만 봐왔는데 이제는 지나가다가 사정이 안 좋아 보이는 집이 있으면 그쪽으로 자꾸 눈이 가고,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좋을 텐데 그 생각이 제일 먼저 앞서요. 매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죠.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 중에 어떤 것을 더 줄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하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현실적인 조건들을 많이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해 이웃들을 도우려 하고 있어요.”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는 이유의 뒤에는 항상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것은 무한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지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그 제약 안에서 최대한을 하게 되면 노력이지만, 보통 우리는 현실을 핑계 삼아 적당히 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녀에게 노력과 양심은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그래서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하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 그녀의 능력이 허락하는 최대한으로 노력하라는 마음이 하는 소리 말이다. 장애인 밑반찬 봉사는 그런 그녀가 가진 능력이라는 울타리에 속하는 봉사였다. 가족들에게 아침·점심·저녁 따뜻한 밥을 해먹이며 쌓은 요리 실력을 발휘해 신체적인 이유로 요리를 할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 직접 만든 밑반찬을 배달하고 있다. 그리고 집수리 봉사, 긴급출동 봉사, 적십자, 목욕봉사, 겨울에는 손뜨개 봉사 등 그녀가 가진 능력이나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봉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돈이 많으면 기부도 하고 하겠지만, 가진 것이 몸 하나밖에 없으니 여기저기 최대한 갈 수 있는 만큼 발로 뛰는 거죠.”
남이 있어야, 나도 있다
“봉사를 하는 순간을 정말로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정말 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내가 진심으로 즐겨야,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제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그래야 저의 도움이 그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복희 씨는 항상 봉사활동을 가기 전날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봉사현장에 가서 이웃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설레기 때문이다. 최복희 씨가 잠들지 못할 정도로 설렐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봉사활동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즐거움은 도움을 받는 이웃들에게 큰 힘이 된다. 행복함이 전염되는 것이다. 그녀를 통해 행복이 더 많은 이웃들에게 번져나가고 있다.
“세상에 남을 돕는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면 너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예요. 내가 먼저 나서서 손을 내밀어야 다른 사람들도 내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아요. 그리고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잖아요. 남이 있어야 나도 있는 거죠.”
10년간의 서울생활과 30년간의 울릉도 생활을 통해 그녀가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다른 이들도 나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다른 이의 어려움을 모른척하면 다른 이들도 나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손을 맞잡아 주었고 그녀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았다고 한다. 그녀가 돕는다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디나, 언제든지
“어디나, 언제든지 부르면 갈 수 있는 사람이 저예요.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봉사가 제 삶을 확실히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고, 이제는 봉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생각도, 찾을 수도 없어요. 봉사가 주는 행복은 다른 행복이랑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대체할 수가 없죠. 스스로가 하는 행동에서 오는 행복이잖아요. 누군가가 대신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봉사를 안 하는 사람은 끝까지 몰라요. 설명해준다고 가늠되는 게 아니니깐.”
그녀의 봉사에는 목적은 있지만, 그 목적이 뚜렷한 것은 아니다. 그 목적은 단지 행복이다. 어떤 행복이 아니라 정말 그냥 ‘행복’ 딱 두 글자다. 행복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그녀가 말하는 행복 역시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질 것이다. 행복은 각자가 스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하지 않으면 봉사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다. 표면적으로만 가늠할 뿐이다.
“다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게 되는 일이 봉사라고 생각해요. 서로가 가진 정(情)을 나누는 것이죠.”
‘정(情)’이라는 단어는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뜻의 단어다. 그녀가 말하는 봉사는 그런 정을 나누는 행위다. 무엇을 보고 감정을 느끼는 것은 공감과 소통이 기본으로 필요하다.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을 보고 우리가 함께 울고 웃는 것 역시 주인공의 입장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사는 나와 이웃들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최복희 씨처럼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